중화민국의 대만 이주와 중국 공산당의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Ÿ 1945년 9월 2일 중일전쟁의 종전 후 국민당과 공산당 진영 간 벌어진 전면적 내전(국공내전)에서 패퇴한 국민당은 1949년 대만으로 철수하며 난징에 있던 중화민국 정부를 이전하였으며, 같은 해 10월 중국 본토에서는 공산당이 중화인민공화국을 수립하였음. ‑ 대만해협을 기준으로 서안(대륙)과 동안(대만)으로 마주 보는 지리적 위치에 기반하여 중화인민 공화국과 중화민국의 관계를 ‘양안 관계’라 칭함. ‑ 대만1) 정부는 1912년 중국 본토에서 수립된 공화정 국가인 중화민국을 계승하였음을 자부하며, 그 주권이 대만 본섬 및 주변 도서에 미치는 국가로서 중국 본토의 중화인민공화국과는 독립된 정부 라는 입장임2) . ‑ 대만과 중화인민공화국이 각각 대만 지역과 중국 본토에 자리잡은 후에도 상당 기간 군사적 충돌이 발생하였으며, 특히 1954년 및 1958년 대만 진먼섬에 인민해방군이 대규모 포격을 가하며 군사적 긴장이 고조되었는데, 각각 1차 및 2차 대만해협 위기로 불림. 2차 위기 이후에도 진먼섬을 대상으로 한 인민 해방군의 포탄 공격 등 군사적 위협이 장기간 계속되었으며, 1979년 중국에서 평화 통일의 염원을 내세워 포격 중단 명령을 내린 뒤로 관련 전투가 중단되었음. 국제사회에서 중국 지역을 대표하는 유일한 주권국가로 중화인민공화국 인정 Ÿ 정부 수립 초기에는 2차 세계대전 중 중국을 대표해 온 장제스의 국민당이 집권한 대만이 미국을 중심으로 한 자유 진영과 안보 협력을 강화하며 국제사회에서 주도적으로 활동하였음. 그러나 중국 본토를 차지한 중화인민공화국의 국력이 향상되고 냉전이 종식되는 등 세계 정세가 변화하면서 중화인민공화국이 중국을 대표하는 유일한 주권 국가로 공식적으로 인정받게 됨. ‑ 대만 정부는 중국 최초의 공화정인 중화민국의 정통을 계승하여 UN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의 지위를 가지고 있었으나, 1971년 UN 총회에서 중화인민공화국의 중국 대표권 귀속 문제를 담은 결 의안이 가결됨에 따라 중화인민공화국이 UN 상임이사국이 되고 대만은 해당 총회 직전 UN을 탈퇴 하였음. 이후 대만은 그간 가입했던 모든 국제기구의 회원국 지위를 상실하였으며, 주권국가로서 외 교권을 공식적으로 인정받지 못하여 국제행사 등에서 공식 명칭인 Republic of China(Taiwan) 대신 Chinese Taipei 또는 Taiwan province of China 등 중국의 영토로 지칭됨. ‑ 중국3) 정부는 외교력을 강화시키며 꾸준히 ‘하나의 중국’* 원칙을 강력히 견지하여 중국과 수교하는 국가는 대만과 단교하도록 하였음. 대만의 최대 우방이었던 미국도 1979년 중국과 국교를 수립하였 으며, 우리나라 역시 1992년 중국과 수교하며 대만과는 단교하였음. * 하나의 중국: 중국 본토와 홍콩, 마카오, 대만은 나뉠 수 없는 하나이고 따라서 합법적인 중국의 정부는 오직 하나라는 원칙. 1) 1949년 대만으로 이전한 중화민국 정부를 이하 ‘대만’이라 칭함. 2) 중화민국 정부 홈페이지(taiwan.gov.tw) 3) 중화인민공화국을 이하 ‘중국’이라 칭하며, 이전까지 소제목을 제외한 본문의 ‘중국’은 중국 지역을 의미함. Ⅰ. 양안 관계: 역사적 배경과 변화의 흐름 2021 이슈보고서 대만을 둘러싼 미‧중 갈등의 배경과 현황 - 3 - 대만 국민당 일당독재 시기 양안 관계는 갈등 지속, 중국과 대만 모두 통일을 지향 Ÿ 대만에서는 국공내전 시절 발효된 계엄령이 1987년까지 유지되며 국민당 일당독재의 권위주의 통치가 오랜 기간 지속되었음. 이 기간 중 반중 감정이 매우 강했고 양안 교류는 단절되었으나 이와는 별개로 집권당인 국민당 위주로 중국 본토를 수복해야 할 영토로 보았기 때문에 ‘하나의 중국’ 원칙에 대해서 일정 부분 공감대가 있었으며 통일을 지향하는 기조가 유지되었음. Ÿ 1979년 중국 전인대 상무위윈회에서는 ‘대만 동포들에게 보내는 편지’라는 담화문을 발표하여 평화적 통일 방침을 천명하였음. 이 담화에서는 통일의 당위성과 함께 대만의 상황을 존중하고 대만 주민들이 손실을 입지 않도록 합리적인 방법을 택하겠다고 밝혔음. Ÿ 1992년 중국과 대만의 정치 지도자들은 민간단체인 중국해협양안관계협회와 대만해협교류기금회를 내세워 ‘하나의 중국을 인정하되, 중화인민공화국과 중화민국 각자의 해석에 따른 명칭을 사용한다’는 92컨센서스에 합의하였음. 중국 정부는 대만 독립 반대와 함께 92컨센서스를 양안 관계의 정치적 기초로 견지하고 있음. ‑ 중국에서는 92컨센서스를 ‘양안이 하나의 중국에 속하고, 조국 통일을 위해 함께 노력한다’는 것으로 이해하는 반면 대만에서는 ‘하나의 중국을 각자 해석한다’는 데 무게를 두고 대만을 곧 하나의 중국 으로 해석한다는 입장임4) . 대만 민주화 이후 경제 부문을 중심으로 양안 관계 개선 Ÿ 1988년 총통에 취임한 리덩후이는 언론 통제를 폐지하고 다당제와 입법원 직선제를 도입하는 등 민주 화를 진행시켜 마침내 1996년 대만 최초의 총통 선거가 실시되었음. 리덩후이는 이 선거에서 승리하여 2000년까지 총 12년 간 총통으로 재임하였는데, 정치활동 기간 중 대만인으로서의 정체성을 강조하는 행보를 보여 ‘대만 독립의 아버지’라 불림. ‑ 중국은 1996년 3월 총통 선거를 앞두고 독립 성향인 리덩후이의 당선을 저지하려는 목적으로 미사일 실험, 접경 지역 대규모 군 배치 등을 강행하여 ‘3차 대만해협 위기’가 발생하였으며, 미국이 무력 개입을 시사함에 따라 중국군이 물러나며 전쟁 위협이 해소되었음. 이 사태는 대만인들에게 공포보 다는 분노를 조장하여 오히려 리덩후이의 득표율을 높이는 결과를 가져왔다고 평가됨. ‑ 2000년 5월 민주진보당(민진당)의 천수이볜이 총통으로 취임하며 약 50년 만에 정권 교체가 이루어 졌음. 그는 2002년 8월 대만 공식 독립을 위한 국민투표를 제안하며 '일변일국론(一邊一國論, 서안과 동안에 각각 하나의 국가가 있다는 것)‘을 천명하는 등 대만 독립을 강조하였음. 그러나 대만 독립을 저지하기 위해 무력 사용을 불사하겠다는 중국의 위협, 범여권 의석이 과반수에 못 미치는 현실적 한계 등으로 2005년 2월 본인의 임기 동안 대만 독립을 선포하지 않겠다고 선언하였음. ‑ 민진당은 강령으로 ’대만은 독립된 주권국가이며, 중화인민공화국에 속하지 않는다‘고 표명하고 있어 민진당 집권시마다 중국과의 관계에서 긴장이 고조되었음. 국민당은 중국과의 통일을 지향하면서 홍콩식 일국양제도 수용할 수 있다는 입장이며, 민진당은 대만이 주권국가로서 독립할 것을 지향함. Ÿ 중국은 천수이볜 정권의 독립 추진을 매우 엄중히 인식하여 2005년 3월 전인대에서 반분열국가법을 제정, 대만이 독립을 추진할 경우 군사를 동원할 수 있도록 하는 법적 근거를 마련하였음. 이 법 8조는 대만 분리주의 세력이 대만 분리를 야기하는 행동을 하거나 대만을 중국으로부터 분리시키는 중대한